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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aeth In Exile

레오의 시노달리타스 기구, 포스트휴머니스트-에코페미니스트의 도움과 함께 동성 “결혼” 논의를 재개

 

<무궁세>는 미국의 전통 가톨릭 논평가인 크리스 잭슨(Christ Jackson)으로부터, 그의 서브스택 블로그 <Hiraeth In Exile>의 글을 번역하고 게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본문에 대한 모든 권리는 그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허락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아래의 하이퍼링크를 클릭하여 그의 저술 활동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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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시노달리타스 기구, 포스트휴머니스트-에코페미니스트의 도움과 함께 동성 “결혼” 논의를 재개

보고서는 교리적 항복을 시노달리타스 은어를 통해 세탁하고, 고정된 가톨릭 가르침을 질나쁜 초안처럼 취급하며, “경청”이라는 미명 아래 동성 “결혼”을 로마로 끌어들이고 있다.

 

| 크리스 잭슨 | 2026년 5월 7일 | 

 

가톨릭 교리의 옛 원수들은 교회의 성벽을 향해 정면 돌파했다. 반면 새로운 원수들은 상담 스케줄을 잡고, 경청을 칭찬하며, 논란들을 두고서 “부각되는 이슈들”이라고 개명한다. 그러고서는 우리더러, 교회가 진리를 “불변하며 경직된 것”인 것처럼 말하기를 멈춰야 한다고 묵묵히 알린다. 이것이 바로 ‘제9연구회’(SG-9) 보고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시노달리타스, 사목, 식별, 동행 등 경건하게 들리는 이명 아래 근대주의에 대한 관료주의적 세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무엇인가

 

제9연구회는 시노달리타스 시노드에 부속된 바티칸 연구회들 중 하나이며, 제9연구회의 최종 보고서는 「부각되는 교리적, 사목적, 윤리적 이슈들의 공통 식별을 위한 신학적 기준들과 시노달리타스적 방법론들」(Theological Criteria and Synodal Methodologies for Shared Discernment of Emerging Doctrinal, Pastoral, and Ethical Issues)이다. 쉽게 말하자면, 본 연구회는 새로운 시노달리타스적 체제 아래서 교회가 논란이 되는 교리적, 도덕적, 사목적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 방법론을 제안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해당 보고서는 그 자체로 정형화된 교리적 판결로서 제시된 것은 아니다. 그 중요성은 제안된 방법론에 있다. 해당 보고서는 논쟁적인 문제들을 “부각되는” 문제들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청, 살아있는 경험, 지역적 식별, “성령 안에서의 대화”, 그리고 문헌에서 반복적으로 요구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접근한다.

 

그 방법론은 두 가지 예시, 즉 ‘동성애 성향을 지닌 천주교인들의 경험’과 ‘능동적 비폭력 문제’에 적용된다. 첫 번째 예시는 시사하는 바가 가장 큰데, 교리가 바뀌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고정된 도덕적 문제들을 재개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시노달리타스적 언어가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자면, 진정한 이슈가 명백해진다. 이 보고서는 경험, 증언, 지역적 식별을 통해 교리를 가공하기 위하여 구축되고 있는 새로운 기구에 관한 것이다.

 

 

방법론이 곧 메시지다

 

첫 번째 속임수는 어휘적인 것이다. SG-9는 “논쟁적인” 이슈에서 “부각되는” 이슈로 넘어 왔다고 말한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상으로는 교리를 전략적으로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다. “논쟁적인”이라는 말은 여전히 누군가가 틀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부각되는”이라는 말은 단지 교회가 새로운 현실을 설명할 방법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암시할 뿐이다. 보고서는 우리가 물려받은 카테고리들과 가동되는 패러다임들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겸손한 방법론적 해명이라도 되는 것마냥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 문헌이 가톨릭적 판단의 카테고리들을 두고서 부족하다고 선언하며 운을 떼는 순간, 자기 패를 보여준 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고서 스스로가 내려 놓은 것들이 되려 그토록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이유이다. 보고서는 개별 이슈들을 확정적으로 판결하기 위한 역량, 특히 교회적 권위가 자신들에게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의뢰받은 적이 없음을 고백하자마자 차후 그러한 이슈들이 논의될 용어들을 다시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이는 오래된 수법이다. 노골적으로 교리를 부인해서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교리를 둘러싼 공기를 비워내고, 그 공간을 “과정”으로 채워 넣고는, 어째서 오래된 확실성이 더 이상 살아 숨쉬지 못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인가, 교리적 항복인가

 

보고서의 무게중심은 “패러다임 전환” 페이지에서 드러난다. 거기에는 교회의 사명이 “불변하고 경직된 방식으로 정리된 원칙들을 추상적으로 선포하고 연역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논쟁은 끝난다. 교회는 실로 계시된 진리를 객관적이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유권적 발전도 동일한 교리를 동일한 의미 안에서 보존해야 한다. 교황 비오 10세는 도그마 공식이 신앙인의 단계적 변화에 맞춰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개념을 정확하게 공격했으며, 도그마가 종교적 감수성과 함께 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단죄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훗날 역사주의에 반대함과 더불어, 가톨릭 일치 바깥의 사람들과 상호 동화를 일구어 내기 위해 오랫동안 수립된 용어들을 도그마에서 벗겨내는 일에 반대했다.

 

아이러니는 거의 웃기는 수준이다. 보고서는 무슨 교회가 도덕적 진리를 공장 배급품마냥 나눠 주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미 포장된” 교리를 배격한다. 그러나 반근대주의 전통은 결코 교리를 죽은 패키지처럼 다룬 적이 없다. 교회는 교리를 신성한 유산으로 다뤘다. 교회가 시대의 분위기에 교리를 맡기길 거부했던 이유가 정확히 여기에 있다. 일단 원칙들이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의혹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면, 신학은 액체가 된다. 액체가 된 신학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향한 비탈로 흘러간다.

 

 

교리에 반대되는 사목

 

 

SG-9의 두 번째 거대한 묘책은 “사목”을 무기화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사목을 해석적이고 생성적인 원리로 정의하고, “지속적인 이론화와 시행” 과정을 옹호하며, “교리주의적, 또는 근본주의적이기까지 한 결정화”를 극복하길 촉구한다. 이에 따르면 오류가 악당인 것이 아니라 교리적 확고함과 “결정화”가 악당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한때 교회가 뼈대 있게 연설했던 것을 곤란해 하는 사람들의 신학이다.

 

이에 반하여 교황 레오 13세는 「영원하신 성부」(Aeterni Patris)에서 고수하길, 교회는 스콜라 철학과 특히 성 토마스를 공경해야 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하였다. 정밀한 정의와 구분이 참신함의 부드러운 거짓말로부터 진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인류」(Humani Generis)에서 동일한 점을 지목했는데, 도그마를 더욱 명확히 진술하기 위해 수세기의 개념적 노력을 폐기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 했다. 또한 레오 13세는 「호의의 증표로서」(Testem Benevolentiae)에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천주교인들이 물려받은 교리를 완화하거나 누락해야 한다는 제안을 명쾌하게 거부했다. SG-9은 예전에 단죄된 유혹을 더 친근한 언어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가 권위에 대해 다루는 방식은 이 점을 확증한다. 보고서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um)을 과정의 맨 앞에 둔 뒤, 경청하고 동행하고 합의가 도출되게끔 돕는 것으로 권위를 재구성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론이 아니다. 「충분히 알려진 바」(Satis Cognitum)에서 교황 레오 13세는 교회가 반드시 하나의 신앙과 동일한 판단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신비체」(Mystici Corporis)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교회가 그 수장들의 거룩한 권능을 지닌 가시적인 몸임을 강조했다. SG-9의 모델은 원심에서 뻗어나가는 형태다. 그 모델은 우리에게 관리된 과정들, 겹쳐진 전문 지식, 차별화된 합의의 교회를 제시한다. 반면 더 오래된 교도권은 가시적인 권위, 객관적인 교리, 사법적 일치의 교회를 제시한다. 차이는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가 로마에 오다

 

 

그리고 진정 웃기면서도 심각한 흔적이 등장한다. 보고서는 “부각됨의 논리학”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 각주에는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가 있다.

천만 다행이게도 해러웨이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해러웨이는 가톨릭 신학자도 아니고, 스콜라 철학자도 아니며, 심지어 진지한 도덕적 권위자조차 아니다. 그녀는 과학과 기술 연구, 포스트휴머니즘, “다종” 이론, 그리고  “촉수 실천”, “공산”(sympoiesis), “친척 만들기”, “사변적 우화”와 같은 표현들을 생산해내는 부류의 학술적 어휘들과 관련된 후기 현대 페미니스트 이론가다. 그녀의 책은 인간, 동물, 지구, 그리고 그녀가 “쑬루세”라고 부르는 생명들의 뒤얽힌 관계 페미니스트 생태 이론서다.

 

이 점이야 말로 그러한 인용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이유이다. 교리적, 도덕적 식별에 관한 바티칸 보고서가, “부각되는” 문제들을 교회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해러웨이에 닿는 것이다. 옛 가톨릭 방법론은 성경, 교부들, 공의회, 로마 교리서, 성 토마스, 트리덴틴, 제1차 바티칸, 반근대주의 교황들을 인용했다. 시노달리타스 방법론은 퇴비, 사이보그, 다종적 세계 만들기를 주장하는 이론가를 인용한다.

 

상황을 희화화할 필요도 없다. 해당 문헌이 이미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있다. 가톨릭적 식별을 안내하고자 하는 바티칸 보고서가 포스트휴머니즘-에코페미니즘 이론에서 그 언어를 빌려올 때, 우리의 의혹을 더 이상 망상이 아니라 패턴 인식으로 여기게 된다. 

 

 

동성 결합 섹션은 조용했던 것을 큰 소리로 외친다

 

 

동성애 성향을 다루는 부분만큼 해당 문헌의 교리적 전환이 명백해지는 곳도 없다. 보고서가 긍정적으로 요약한 한 증언은 죄가 “(동성) 커플 관계 안에 있지 않다”라는 “발견”에 다다른다. 그러고 나서, 보고서는 교회의 실제 어려움을 “교리적 확고부동함”과 “사목적 환대” 사이의 긴장으로 규정하여, 오로지 경험을 경청하고, “이미 포장된” 교리로부터 응용을 이끌어내는 모델을 포기해야만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신학적 치장이다. ‘방법론’이라는 미명 하에 ‘결론’이 밀반입되는 것이다.

 

그 정점은 보고서가 뚜렷한 “파레시아”를 통해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결혼”을 언급할 수 있을지 물을 때 나타난다. 비록 보고서가 “그 자체로 자명한 출산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이성애적 부부 관계와 동성 결합 사이의 실질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가면이 벗겨진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개인에 대한 동정 어린 동행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혼의 본질 그 자체를 재정립하려는 압박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공의회 이전의 가르침은 여기서 충격적일만큼 명백하게 다가온다. 「정결한 혼인」(Casti Connubii)에서 교황 비오 11세는 혼인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부부 결합이고 그 본질은 인간의 변덕으로부터 독립적이라 가르치며, 또한 그 일차적인 목적이 출산과 자녀 교육이라 하였다. 더불어 교황은 인간의 권위가 그 본질적 속성을 재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단 원칙을 받아들이면 SG-9이 던진 질문이 진정 무엇인지가 폭로된다. 사목적 감수성이 형이상학적 작업을 완수한 척 가장하면서, 혼인이 아닌 것을 혼인이라 부르자는 초대장인 것이다. 그러나 완수된 형이상학적 작업은 없다. 수사학적인 작업이 완수되었을 뿐이다.


이 중 어느 것도 개인을 향한 잔혹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 교회는 진리와 자비 중에 양자택일을 하라고 명령받지 않았다. 거짓된 대안은 보고서의 가장 유독한 가정 중 하나다. 영혼을 향한 애덕은 인내, 연민, 진정한 사목적 돌봄을 요구한다. 애덕은 도덕적 대상을 역전하거나 무질서한 상황을 감성적으로 정규화하길 요구하지 않는다. 보고서의 비극은 교리적 명확성을 상처로 취급하고, 모호함을 약으로 취급한다는 데 있다.

 

 

정의로운 전쟁에서 치유 정치로

 

 

“능동적 비폭력”에 관한 섹션 역시 동일한 템플릿을 따른다. 보고서는 정당한 방어, “그리고 더 나아가 정의로운 전쟁”을 위해 활용되었던 체계가 갈 수록 부족해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현대 정치 사례 연구를 활용하여 교회 공동체들이 폭력과 강압, 분쟁에 대해 시노달리타스적으로 재고하도록 초청한다. 또 한 번, 이슈는 그리스도인들이 비폭력을 증언하는 영웅적 행위를 지킬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킬 수 있다. 다만 진짜 이슈는 교회가 물려받은 도덕적인 변별력이 권위 있는 규범으로 취급되느냐, 아니면 더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으로 대체되길 기다려야 하는 낡은 도구로 취급되느냐 하는 것이다.

 

공의회 이전의 답은 무조건적인 평화주의가 아니었다. 교황 비오 10세의 교리 교육 전통은 정의로운 전쟁 및 필요한 방어에서 살인하는 것은 합법적일 수 있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피에 굶주린 것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 현실주의다. 가톨릭 정치체제는 치유 세미나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 일단 정당한 방어라는 카테고리가 일반화된 의혹으로 해체되고 나면 도덕 신학은 감상적이 되고, 교회는 무슨 세상이 타락하지 않았길 바라는 것에 정치적 순수함이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설하기 시작한다.



이는 “개혁”이 아니라 변질이다

그렇다면 교회법적, 사목적 결론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권위의 속이 도려진다. 결과가 “미리 확립된 공식들”로 예견되지 못하게 되면, 지역적 식별이라 하는 것은 실천적 일탈을 지속적으로 유도하게 된다. 두 번째로, 규범이었던 교리는 대화 파트너로 전락한다. 세 번째로, 사목 생활이 불안정해지는데, 사제들과 주교들이 교회가 한때 말했던 것보다 덜 명백하게 말함으로써 포용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평신도들은 신앙이라는 것이 계시받은 유산이라기보다는 부각된 담론들을 협상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아이디어로 교육을 받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청음초소는 많은데 나팔 소리는 적은 교회를 만드는 방법이다.


여기서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는지 볼 수 있다. SG-9은 오해의 여지 없이 반근대주의 교도권으로부터 배격당한 오류들과 가족 유사성을 띠고 있다. 경험이 왕좌에 앉는다. 교리는 약화된다. 권위는 절차화된다. 참신함은 곧 신덕인 것으로 정당화된다.


결론

 

신앙의 유산을 지키는 데 있어서 교회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는 주교들,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은 더 이상 완곡어법에 감명받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저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교리는 가공을 필요로 하는 원자재가 아니며 자비는 전략적 불명확함의 기술이 아니라는 옛 가톨릭 직감을 회복해야 한다. 반근대주의 문서들을 다시 읽고,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본질 안에서 신앙을 다시 가르쳐야 한다. 목자들이 교회의 언어를 지키지 않는다면, 늑대들이 기쁘게 언어를 조작할 것이다.

 

 

비교표

SG-9의 주장 SG-9 보고서 내 위치 제2차 바티칸 이전 출처 반박
1. ‘논쟁적인’ 이슈에서 ‘새로 부각되는’ 이슈로의 전환, 고정된 카테고리에서 원형적인 교리적-사목적-윤리적 분석으로의 전환 pp. 4-6 「호의의 증표로서」, 「인류」 논쟁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지 않음. 단지 교리가 약화되는 동안 저항을 마비시킬 뿐임.
2. ‘패러다임 전환’, 그리고 ‘불변하고 경직된 방식’으로 원칙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거부 pp. 8-9 반근대주의 선서,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Pascendi), 「인류」 교회는 신앙의 유산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지만 그것을 과정과 맞바꿀 수는 없음.
3. 생성적 원리로서의 ‘사목’과 ‘지속적인 이론화 및 실행’ pp. 16-17 「영원하신 성부」, 「인류」 ‘사목’이 직무적이기보다 창의적이 될 때, 신학적 방종을 위한 완곡어법이 됨.
4. ‘교리주의적, 또는 근본주의적이기까지 한 결정화’에 대한 반대 p. 17 「영원하신 성부」,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엄밀함은 병적인 것이 아님. 옛 교도권은 명확한 변별력을 영혼의 방패로 여겼지, 곤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
5. 신자들의 신앙 감각, 그리고 차별화된 합의를 향해 정돈된 권위 pp. 17-18 「충분히 알려진 바」, 「신비체」 가톨릭 일치는 거룩한 권위 아래 가시적인 몸 안에서 하나된 신앙이지, 지역적 결과물들의 관리된 다원성이 아님.
6. ‘성령 안에서의 대화’, ‘부각됨의 논리학’, 그리고 ‘새로운 합의’의 가능성 pp. 18-19 「충분히 알려진 바」, 「호의의 증표로서」 일단 합의가 신앙 고백을 대체하면, 가장 목소리가 큰 프로세스 관리자가 실질상의 교도권이 됨.
7. 동성애 섹션에서 ‘이미 포장된’ 교리를 거부하는 것 pp. 26 반근대주의 선서,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이미 포장된 교리’라는 문구는 여전히 구속력이 있는 교리를 비웃는 것일 뿐임.
8. 동성 결합을 사목적 난관으로 취급하고, ‘결혼’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 pp. 24-27 「정결한 혼인」 혼인은 더 많은 대상에게 붙여지길 기다리는 꼬리표가 아니라 신성한 목적과 본질적인 속성을 지닌 현실임.
9. 적당한 방어, 특히 ‘정의로운 전쟁’의 오래된 체계적 틀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주장 pp. 28-30 『성 비오 10세 교리문답』, 고전적인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영웅적인 비폭력은 찬사를 받을만하지만, 그것이 무력 방어의 도덕적 정당성을 지우지 못함.

 

 

타임라인

 

아래의 타임라인은 공의회 이전의 반근대주의적 결집을 추적한 뒤, SG-9이 자신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기반으로 명시하고 있는 공의회적 전환점을 나타내는 도표이다. SG-9은 1965년의 트로이 목마 문헌들을 프리텍스트로 활용하여 수세기의 프리어 전통 가톨릭 가르침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1870년 1879년 1885년 1896년 1899년 1907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영원하신 성부」 「불멸하시는 천주」(Immortale Dei) 「충분히 알려진 바」 「호의의 증표로서」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과 「개탄스러운」(Lamentabili)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와 「천주의 성자」(Dei Filius) 교황 레오 13세, 토마스주의와 스콜라 철학적 방법론을 복원 자유주의적 무차별주의에 대한 도전 가시적인 일치와 하나인 신앙 시대정신 수용에 대한 저항 근대주의를 확인하고 단죄
1910년 1930년 1943년 1950년 1962년 1965년
반근대주의 선서 「정결한 혼인」 「신비체」 「인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과 「인류의 빛」(Lumen Gentium)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요지 신성한 제도이자 자연적 목적으로 혼인을 정의 가시적 교계 제도로서의 몸을 재확인 역사주의와 누벨테올로지(nouvelle-tehologie) 경향을 검토 공의회 개막 공의회 문서가 훗날 SG-9에 의해 패러다임 전환의 보증으로 차용됨

 

 

ⓒ 2026 Christ Jackson

 

[원문] Leo’s Synodal Machine Reopens Gay “Marriage” — With Help From a Posthumanist Eco-Feminist